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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연대표 Wall Street Timeline

카페블루 2025. 5. 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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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istory.com/articles/wall-street-timeline  왼쪽 링크에서 번역해서 올렸습니다.

월스트리트 연대표

월스트리트는 맨해튼 남부에 위치한 8블록 길이의 짧은 거리로, 미국 금융 시장의 본거지입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는 단순한 지리적 위치를 넘어, 미국 금융 기관 전체와 경제적 권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이미지는 강력하고, 야심차며, 때로는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과도하며, 상승세를 타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아래는 월스트리트와 그 상징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연대표입니다.

목재 벽으로서의 월스트리트

  • 1652년: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앵글로-네덜란드 전쟁 동안, 당시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던 맨해튼 섬의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영국의 공격을 우려하여 방어용 목재 벽을 건설했습니다.
  • 이 벽은 15피트 높이의 판자와 흙으로 구성되었으며, 길이는 2,340피트, 높이는 9피트였습니다. 벽에는 대포가 설치되었고, 현재의 월스트리트와 펄 스트리트, 월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의 교차점에 각각 문이 있었습니다. "데 왈 스트라트(de Waal Straat)"로 불리던 이 구조물의 흙 부분은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과 해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건설된 방어 시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벽의 건설에는 노예 노동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약 50년 후, 벽은 노후화되어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1693년 프랑스의 침공을 우려하여 복원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1699년에 철거되었습니다.
  • 1711년 12월 13일: 월스트리트는 뉴욕시 정부가 승인한 노예 시장의 장소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시장은 1762년까지 운영되었으며, 펄 스트리트의 원래 월스트리트 문 중 하나에 위치한 목재 건물로, 내부에서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져 시에 세금을 제공했습니다.
  • 1731년: 해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월스트리트의 시청에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 1788년: 뉴욕시가 미국의 첫 번째 수도가 되면서 시청은 공식적으로 연방 홀(Federal Hall)로 개명되었습니다. 이곳은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장소이며, 미국 역사학회(New York Historical Society)의 첫 번째 본거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812년에 철거되었습니다.

버튼우드 트레이더들

  • 1792년 5월 17일: 전년도부터 월스트리트의 버튼우드 나무 아래에서 거래를 시작한 증권 거래자들은 버튼우드 협정(Buttonwood Agreement)을 통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정부의 개입과 외부인의 참여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비회원이 주식을 구매하려면 승인된 중개인을 통해야 했습니다. 서명자들은 처음에 월스트리트와 워터 스트리트의 교차점에 위치한 톤틴 커피 하우스(Tontine Coffee House)에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이 건물은 노예 거래에도 사용되었습니다. 10년 후, 이들은 월스트리트 55번지의 상인 거래소(Merchants’ Exchange) 건물로 이전했습니다.
  • 1817년 3월 8일: 필라델피아 상인 거래소를 방문하고 관찰한 후, 버튼우드 트레이더들은 이를 모델로 삼아 뉴욕 증권 거래 위원회(New York Stock and Exchange Board)를 설립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매일 아침 거래되는 주식을 발표하는 앤서니 스톡홀름(Anthony Stockholm)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습니다.
  • 거래소에는 드레스 코드가 있었으며, 회원들은 상의와 모자를 착용했습니다. 거래소의 자리를 얻으려면 투표를 통해 선출되어야 했고, 25달러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수수료는 1837년에 100달러로, 1848년에 400달러로 인상되었습니다.
  • 1835년 12월 16일: 1835년의 대화재로 맨해튼 남부의 700개 건물이 파괴되어 4천만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월스트리트는 톤틴 커피 하우스와 상인 거래소 건물을 포함한 수많은 자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 1837년: 새뮤얼 모스(Samuel Morse)는 월스트리트에 전신 시연 사무소를 열고, 자신의 발명품을 보기 위해 25센트를 받았습니다. 중개인들은 전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곧 이 지역은 중개 회사들이 원격으로 통신할 수 있도록 전신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식 시세 표시기의 탄생

  • 1867년: 에드워드 A. 칼라한(Edward A. Calahan)이 발명한 주식 시세 표시기가 월스트리트에 도입되었습니다. 이 기계는 거래 내역을 좁은 종이 띠에 인쇄하여, 이를 직원들이 타자수에게 전달하고, 타자수는 전신을 통해 중개인에게 정보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투자자들이 전국 어디에서나 실시간으로 주가를 확인할 수 있게 하여 주식 시장에 혁신을 가져왔습니다.
  • 1870년 2월 5일: 빅토리아 우드헐(Victoria Woodhull)과 테네시 클라플린(Tennessee Claflin) 자매는 코넬리우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의 자금 지원을 받아 월스트리트에 최초의 여성 소유 주식 중개 회사를 열었습니다. 밴더빌트는 이 자매들이 진행한 강신술에 관심을 보였고, 테네시는 그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 여성들이 뉴욕 증권 거래소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더 어려웠습니다. 1940년대에야 여성들이 거래소의 후방에서 일할 수 있었고, 1967년에야 뮤리엘 시버트(Muriel Siebert)가 최초로 뉴욕 증권 거래소의 자리를 얻은 여성이 되었습니다.
  • 1882년: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월스트리트의 7,200개의 램프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펄 스트리트에 세계 최초의 전기 발전소를 개설했습니다.
  • 1889년 7월 8일: 다우 존스 & 컴퍼니(Dow Jones & Company)가 발행한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이 2센트의 가격으로 창간되었습니다. 이 신문의 가장 인기 있는 특징은 주식 성과를 차트로 나타낸 "다우-존스 산업 평균(Dow-Jones Industrial Average)" 지수였습니다.

뉴욕 증권 거래소 개장 (NYSE Opens)

  • 1903년: 2년간의 공사 끝에, 조지 B. 포스트(George B. Post)가 설계한 새로운 뉴욕 증권 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 건물이 브로드 스트리트 18번지에 개장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웅장한 코린트식 기둥, 존 퀸시 아담스 워드(John Quincy Adams Ward)의 조각상, 대리석 거래소 바닥, 70피트 높이의 천장을 자랑했습니다.

이 건물은 미국 최초로 공기조절 시스템(에어컨디셔닝)을 갖춘 건물 중 하나였으며, 그 설비는 엔지니어 알프레드 울프(Alfred Wolff)가 설계하였습니다. 건물 아래에는 수백 개의 지하 금고가 있어, 주식 증서들이 안전하게 보관되었습니다.

J.P. 모건 앞 폭발 사건 (Explosion at J.P. Morgan)

  • 1920년 9월 16일: 오후 12시 1분, 월스트리트의 어세이 오피스(Assay Office) 앞에 주차되어 있던 마차 한 대가 폭발했습니다. 이 폭발은 매우 강력하여 거리 전체에 충격파를 발생시켰으며, 차량 한 대는 공중으로 날아 올라 에퀴터블 빌딩(Equitable Building)의 34층까지 튕겨 올라간 후 추락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많은 말들도 희생되었고, 여러 건물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즉시 거래는 중단되었고, 현장은 경찰로 가득 찼습니다.

수사관들은 사건의 표적이 J.P. 모건 은행일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이 그곳에서 일하는 사무원 및 속기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모건 본인은 당시 휴가 중이었습니다.

익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우편함에 또 다른 폭탄 공격을 예고하는 전단을 남겼고, 이 사건은 결국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단체인 갈레안파(Galleans)의 소행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연방수사국(Bureau of Investigation)의 3년 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체포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1929년 주식 시장 대폭락 (The 1929 Stock Market Crash)

  • 1929년 10월 24일 (블랙 목요일, Black Thursday): 1928년부터 주가는 50% 이상 치솟았으나, 경제가 둔화되고 있었고 경제학자 로저 밥슨(Roger Babson)은 시장 붕괴를 경고했습니다.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고, 10월 24일 시장은 하루 만에 11% 폭락했습니다.
  • 1929년 10월 28일 (블랙 화요일, Black Tuesday): 공황이 본격화되면서 1,600만 주가 거래되었고, 이후 하루 만에 시장에서 300억 달러가 증발했습니다. 일시적인 반등이 있었지만 피해는 이미 발생했고, 시장은 계속 하락하여 1932년에 최저점을 찍게 됩니다.

이 붕괴로 인해 미국 경제는 1930년대 전체를 뒤덮은 대공황(Great Depression) 시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시기는 대량 실업과 빈곤으로 정의되며, 미국 역사상 가장 심각한 경제적 시련이었습니다.

1987년 블랙 먼데이 (Black Monday)

  • 1987년 10월 19일: 월스트리트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단일 하루 폭락 중 하나를 겪게 됩니다. 전 세계 증시가 동반 하락하면서 미국 증시는 하루 만에 5,000억 달러가 증발했습니다. 이 날은 '블랙 먼데이'로 알려졌고, 주가는 전날 대비 22.6% 하락했습니다. 이는 1929년 대공황보다도 더 급격한 하루 하락률이었습니다.

이 폭락의 주요 원인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한 자동화된 매도 명령이었습니다. 당시 증권사들은 일정 가격 이하로 하락하면 자동으로 매도하는 '프로그램 트레이딩'을 설정해두고 있었는데, 하락이 시작되자 자동 매도 명령이 연쇄적으로 발동되며 시장은 폭주하게 됩니다. 매도 주문은 폭주했지만 매수자는 없었고, 호가는 사라졌습니다.

이 사태 이후, 거래소는 자동화된 매도 알고리즘에 대한 통제를 위해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합니다. 이는 주가가 일정 폭 이상 하락할 경우 거래를 일시 중단시켜, 과도한 공황을 막기 위한 장치입니다.

블랙 먼데이는 단지 기술적 요인만이 아니라, 투자자들의 심리와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월가의 리스크 관리 체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월가 (Wall Street After 9/11)

  • 2001년 9월 11일: 월스트리트가 위치한 뉴욕 금융 지구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를 맞이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항공기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공격하면서 2,996명이 사망하고 6,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금융 지구 전체를 마비시켰습니다. 생존한 금융회사들도 접근이 어려웠고, 통신망은 심각하게 손상되어 시장은 7일간 폐쇄되었습니다. 복구 이후 월가 주변에는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One World Trade Center)'를 포함한 재건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금융 지구의 보안도 대폭 강화되었습니다.

9/11은 단지 물리적 피해뿐 아니라, 금융 시스템과 국가 안보, 시장 심리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월가는 보다 강도 높은 재난 대비 체계와 디지털 백업 인프라를 갖추게 됩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Subprime Mortgage Crisis)

  • 2008년 9월: 2008년은 1929년 이후 최악의 금융 위기가 터졌던 해였습니다. 이 위기는 저신용(subprime) 주택담보대출의 과도한 취급과 그로 인해 형성된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파생상품(CDO, CDS 등)을 통해 부실한 주택담보대출을 포장해 판매하였고, 이 구조가 무너지자 연쇄적으로 손실이 확산되었습니다. 결국:

  • 정부는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을 국유화했고,
  • 미국 4대 투자은행 중 하나였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는 파산했으며,
  • 세계 최대 보험사 중 하나였던 AIG는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이후 수많은 은행이 파산하거나 합병되었고, 정부는 수조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TARP 프로그램)을 발표하여 시스템 붕괴를 막고자 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은 폭락했고, 수백만 가정이 강제퇴거 및 주택 압류를 당했습니다.

이 위기는 월가의 고위험 투기 관행, 파생상품 규제 부재, 신용평가사들의 부정직함 등 금융 시스템의 전반적인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고, 전 세계 경제에 타격을 입혔습니다.

2011년 월가 점령 시위 (Occupy Wall Street)

  • 2011년 9월 17일: 2008년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여전히 남아있던 가운데, 미국 뉴욕의 주코티 공원(Zuccotti Park)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모여 경제 불평등과 금융 권력의 독점을 규탄하는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우리는 99%다(We are the 99%)"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상위 1%의 부의 독점과 정치적 영향력에 저항했습니다. 리더 없는 자발적 조직 구조와 직접 민주주의 방식을 특징으로 했으며, 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유사한 시위가 벌어졌고, 점차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계되며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2011년 11월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지만, 이후 여러 풀뿌리 운동과 진보적 정치운동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결론 (Conclusion)

월가는 단지 뉴욕의 짧은 거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미국 금융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전 세계 자본 흐름을 지배하는 중심축이다. 버튼우드 나무 아래에서 시작된 작은 증권 거래는, 수세기 동안 거대 금융 제국으로 진화했고, 그 과정 속에서 전쟁, 폭력, 경제적 공황, 기술적 혁신, 그리고 사회적 저항을 모두 경험해왔다.

그러나 월가는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금융 권력의 집중과 부의 편중, 반복되는 금융위기, 시민의 분노와 저항, 자동화된 금융 알고리즘까지 — 월가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명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앞으로 월가는 디지털 자산, ESG 투자, 인공지능 트레이딩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물결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월가를 더 이상 방관하거나 신화화하지 말고, 비판적 사고와 감시 속에서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금융 질서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Sources)

  • 《Wall Street: A History》, 찰스 R. 게이스트(Charles R. Geisst),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 2018
  • 《Gotham: A History of New York City to 1898》, 에드워드 G. 버로스 & 마이크 월리스,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 2000
  • 《A Short and Remarkable History of New York City》, 제인 무샤백, 포드햄대학교 출판부, 1999
  • 《The Rise of Wall Street》, 스카이스크래퍼 뮤지엄
  • HISTORY.com: "Wall Street Timeline", 편집부, 최종 수정일 2025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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