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Plain Talk on Death)
죽음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Plain Talk on Death)
이 글은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한 가까운 친척을 위해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그것의 확실성 (Its Certainty)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많지 않지만, 죽음은 그중 하나입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각주 1: 성경은 육체적 죽음의 확실성에 대한 몇 가지 이례적인 예외를 언급합니다. 예를 들어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또한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전체 한 세대의 믿는 자들에 대해서도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5:51–52). 참으로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드문 예외들은 오히려 그 원칙을 더욱 확증해줍니다.]
모든 사람은 출생일이 있고, 모든 사람은 사망일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묘지들이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친구들, 사랑하는 이들 중 일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의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단지 불확실한 것은 그 ‘시간’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150번째 생일을 살아서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꽤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인도의 한 공동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멈추어 서시오,
지금 당신이 있는 모습은 한때 나의 모습이었소.
지금 나의 모습은 곧 당신의 모습이 될 것이니,
죽음을 준비하고 나를 따르시오.
그것의 두려움 (Its Fear)
죽음은 모든 두려움의 왕입니다 (히브리서 2:14–15). 인간을 얽매는 많은 공포증들이 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너무 불쾌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잊으려 합니다. 우리는 무덤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곧 그곳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하물며 그것을 준비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기 (Facing the Inevitable)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히브리서 9:27)
우리는 의사나 치과 의사에게 진료 예약을 잡고, 그 약속을 지킬 수도 있고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약속을 갖고 있으며,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집니다. 의사 사무실에서는 다음 예약 날짜가 적힌 카드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과의 약속은 다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대부분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말기 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처럼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이 매우 가까웠음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경고조차 없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수천 명이 다른 날처럼 세계무역센터로 출근했습니다. 그날이 자신의 지구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1889년 존스타운 홍수(2,209명 사망)나 타이타닉호 참사(1,525명 사망)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이러한 약속을 준비할 수 있을까
(Can a Person Prepare for Such an Appointment?)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적으로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 그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물론 나는 죽을 거야.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잖아.”라고 쉽게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건 나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상 일어나지만,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지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로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실감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 전에도 오랫동안 지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나를 덮쳤을 때, 나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나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고, 당시 나는 코네티컷주 웨스트 하트퍼드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만화책이나 잡지를 읽는 대신, 왠지 모르게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고, 갑자기 죽음의 현실이 나를 강타했습니다. 나는 거의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 조지 젤러, 진짜로 죽을 거야.’
내 인생에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나는 살아가는 것을 정말로 즐기고 있었고, ‘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잠시 동안 나를 완전히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후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가끔 다시 떠오르곤 했습니다. 물론 그날처럼 강렬하게 다가온 적은 다시 없었지요. 아마 이발사는 왜 내가 그렇게 창백했는지 궁금했을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What Happens to a Person?)
사람이 죽으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죽은 후 다시 돌아와서 그 경험에 대해 말해주지 않습니다.
[각주 2: 임사체험(NDE, Near Death Experiences)은 말 그대로 ‘죽음에 가까이 간’ 경험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죽지 않았습니다. 만약 실제로 죽었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사체험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은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단순히 존재를 멈춘다.
- 사람이 죽은 후, 다른 형태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온다. (다른 사람? 동물? 식물?)
- 사후세계(Afterlife)가 있다. 즉, 무덤 너머에도 존재가 계속된다. 사람은 ‘사라지는(pass away)’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건너간다(passes on).’
이 중 첫 두 가지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
1) 유물론 (Materialism)
사람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첫 번째 가능성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단순히 존재를 멈춥니다 (의식적 존재로서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유물론(materialism)이라는 철학에 기초합니다. 이 이론은 물질이 유일한 실재이며, 존재와 과정, 현상의 모든 것이 물질의 표현이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즉, 이 견해를 가진 이들은 “중요한 것은 물질뿐이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 이론은 공산주의와 진화론과 같은 사상운동의 기초가 됩니다.
[각주 3: 공산주의는 그 핵심에서 무신론적입니다. 공산주의자는 하나님을 부정하기 때문에 창조주도 부정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창조된 적이 없다면, 물질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가르치며(시편 90:2), 물질은 창세기 1장에서와 같이 창조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인간에게 영혼이나 영(spirit)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뼈, 피, 뇌 등으로 구성된 단순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단지 원자, 분자, 화학물질의 집합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단지 육체뿐이라면, 육체가 죽으면 끝입니다! 그 사람은 무덤 너머에 어떤 의식적 존재도 가지지 못합니다. 물론 그 사람을 구성했던 원자와 분자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육체는 결국 먼지로 돌아갑니다.
[각주 4: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물질)는 창조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습니다. 죽은 후에도 인간의 육체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 존재합니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고 믿습니다. 무덤 너머에 의식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이 생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발소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을 때 갖고 있던 견해와 비슷합니다. 나는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 천국과 사후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배웠지만, 어쩐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각주 5: 주 예수님은 ‘인간이 단지 육체일 뿐인지’에 대한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이 말씀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무덤 너머에도 존재하는 비물질적, 비육체적인 부분이 있습니다(“혼” the soul). 또한 사후세계(“지옥” hell)도 존재합니다.]
2) 환생 (Reincarnation)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 안에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 “환생(Reincarnation)”이라는 용어는 ‘다시 육신 안으로 오는 것’을 뜻하거나, ‘육체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 영혼이 새로운 몸이나 새로운 생명 형태(어쩌면 동물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이전 생을 살았으며(어쩌면 나는 한때 아틸라 대왕이었거나 토마스 제퍼슨 혹은 스컹크였을지도 모릅니다), 미래에도 여러 번의 삶을 더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영혼이 여러 번의 연속된 환생을 거친다고 믿습니다. 이 환생은 더 높은 존재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즉 더 높은 카스트 계급의 인간이나 신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 생의 행위(카르마, Karma)에 따라 더 낮은 계급의 인간으로, 또는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과 동물 모두가 이전 삶의 행위로 인해 현재의 위치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은 이 환생 이론을 한 구절로 단호히 부정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KJV)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히브리서 9:27, 흠정역)
만일 환생이 사실이라면, 사람은 여러 번 죽고 계속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한 번 죽는다고 말합니다. 죽은 후에는 다른 존재로 다시 지구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3) 정말로 사후세계가 있는가?
(Is There Really an Afterlife?)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덤 이후에도 진정한 존재가 계속되는 걸까요?
당신의 죽은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에게 이 난해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들이 무엇이라 말할지 보세요!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죽은 사람은 돌아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죽음은 편도 통행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통로입니다.
인생에는 인간 스스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두 가지 큰 미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 둘은 외부의 도움, 즉 초자연적 계시 없이는 알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미지는 미래이며, 두 번째 미지는 무덤 너머의 세계, 즉 사후세계입니다.
사람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아시는 분은 단 한 분뿐입니다. 우리는 미래 사건에 대해 완전히 깜깜합니다. 오늘 하루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각주 6: 만약 점성술사나 예언자들이 정말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왜 그들은 지금 직장을 그만두고 주식에 투자하거나 경마에 돈을 걸지 않을까요?]
오직 한 분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와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끝을 처음부터 밝히며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일들을 옛적부터 밝히고 이르기를, 내 계획이 설 것이요 내가 나의 모든 기쁨을 이룰 것이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10, 흠정역 / KJV 동일)
감사하게도 그분은 단지 아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계획 안에 두시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또한 미래에 일어날 일들 중 일부를 우리에게 계시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가 아닙니다.
[각주 7: 이사야 46:9-10 말씀과 관련해 더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www.middletownbiblechurch.org 에 있는 “예언—다가올 사건들의 미리 보기” 학습 자료를 참고하세요.]
마찬가지로, 무덤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스스로 알아낼 수 없습니다. 이 미스터리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사후세계에 대한 확실하고도 분명한 정보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역사상 단 한 분만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무덤은 모든 사람을 그 강력한 손아귀에 붙잡아 두었지만, 단 한 분이 그 감옥에서 튀어 나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과 역사적 인물들은 모두 무덤에 묻혔고, 그 유해는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먼지가 되었더라도). 단 한 가지 놀라운 예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무덤 — 차 있음!
모세의 무덤 — 차 있음!
공자의 무덤 — 차 있음!
석가모니의 무덤 — 차 있음!
마호메트의 무덤 — 차 있음!
예수님의 무덤 — 비어 있음!!!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함
(The Uniqueness of Christ)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설로만 사용하지만, 그분의 삶의 독특함으로 인해 그분께 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삶과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약 2,000년 전, 한 이름 없는 시골 마을에서 한 아이가 낮은 신분의 여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다른 마을에서 자라며 목수로 일했습니다.
30세쯤 되었을 때, 그는 가르치고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대학도 신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책을 쓴 적도 없습니다.
공직을 맡은 적도 없습니다.
가정을 가진 적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2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여행한 적도 없었습니다.
30대 초반에 그는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처형자들은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물건—그가 입던 단순한 겉옷—을 두고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의 시신은 빌린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3일 후, 이 사람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장한 대로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되셨습니다.
19세기가 흘렀고, 오늘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의 중심 인물입니다.
우리의 달력은 그의 탄생을 기준으로 역사를 두 시대로 나눕니다.
일주일 중 하루는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정해져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명절은 그의 탄생과 부활을 기념합니다.
이 한 사람의 생애는 역사상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보다도 더 많은 노래, 책, 시, 그림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수천 개의 대학, 병원, 고아원, 그 외 여러 기관들이 그분을 기리며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전쟁에서 행군했던 군대들, 모든 바다를 항해했던 해군들, 모든 정부들, 모든 왕들이 역사에 끼친 영향은
이 한 분의 고독한 생애가 역사에 미친 영향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이제 이 독특한 인물의 삶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살펴봅시다: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of Christ)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시신은 새 무덤에 안치되었고, 거대한 돌이 무덤의 유일한 출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마태복음 27:62–66).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3일째 되는 날, 이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하리 후디니(Harry Houdini, 미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마술사이자 탈출술사, Escape Artist)조차도 그 무덤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철저하고 확고하게 증거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1–8을 보십시오. 이 구절에는 예수님이 죽은 후 살아나신 모습을 본 여러 사람들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한 번에 500명 이상이 그분을 본 적도 있었습니다 (6절).
만약 공정한 배심원단 앞에서 모든 증거들이 제시되고, 수많은 목격자들의 진술이 증거로 제출된다면,
배심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들이 이 결론을 압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 부활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파괴하고 거짓 종교로 만들 것입니다.
기독교의 주장을 고려해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 빈 무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영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조지 리틀턴(George Lyttelton, 1709–1773)은, 합리주의, 불가지론, 자연신론이 서유럽에서 널리 퍼졌던 시기에 살았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그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사무엘 존슨 박사(Dr. Samuel Johnson)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첫발을 내딜 때,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흔들려는 사람들이 있었지. 나는 그런 신앙의 어려운 부분들을 보고 당혹감을 느꼈어…”
리틀턴은 기독교가 허위임을 밝히기 위해 친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함께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리틀턴은 사도 바울의 회심을, 웨스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제로 삼아, 비판적으로 파헤치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편견을 가지고 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려는 노력 끝에, 두 사람은 도리어 복음을 믿게 되었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기만이 드러난 것을 축하하려 모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슬퍼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된 기쁨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깊이 있는 연구는, 계시에 대한 가장 탁월한 두 권의 논증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리틀턴의 「사도 바울의 회심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n the Conversion of St. Paul)이며,
다른 하나는 웨스트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n the Resurrection of Christ)입니다.
[각주 8: 회의론자가 증거를 조사한 끝에 변화된 또 다른 예는 루 월리스(Lew Wallace)입니다. 그는 『벤허(Ben-Hur)』의 저자입니다. 월리스는 유명한 불신론자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잉거솔은 월리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루,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신화 속 인물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는 책을 하나 써보지 그래?”
월리스는 가능한 모든 증거들을 조사하기 위해 시간과 자금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잉거솔이 원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벤허』를 읽어본 이들은 그 결론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빈 무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웨스트와 같은 사람들은 부활을 부정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연 웨스트가 나중에 했던 것처럼,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고,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증거의 풍성함을 살펴본 적이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록을 검토하거나 증거를 따져보려는 수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어떤 종교 지도자나 정치인이 방송에서 이런 발표를 한다면 어떨까요?
“여러분, 내가 런던에 가면 내 적들이 나를 죽일 것입니다. 내 시신은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나는 다시 살아날 것이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예언입니까?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지상 사역 중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 17:9, 17:22–23, 20:18–19, 26:32 등 참고)
그리스도께서는 다양한 시기, 다양한 환경, 다양한 사람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때는 단 한 사람에게 나타나셨고, 어떤 때는 두 사람에게,
또 어떤 때는 일곱 명 이상, 그리고 한 번은 500명 이상에게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6).
그 부활하신 주를 본 사람들 중에는 여인들도 있었고, 남성들도 있었으며,
세리였던 사람도 있었고, 어부도 있었고, 회의주의자(도마)도 있었고,
최근에 주를 부인했던 자(베드로)도 있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의 적(다소 사람 사울)도 있었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은 온갖 조건과 장소에서 목격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원에서 그분을 보았고,
어떤 이들은 방 안에서,
어떤 이들은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이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분과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분은 유대에서도, 갈릴리에서도 여러 번 나타나셨고,
한 번은 갈릴리 북쪽, 다메섹 근처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산 위에서 만난 자도 있었고,
동틀 무렵에 본 사람도 있었으며,
한낮이나 밤에도 목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후에도 40일 동안 살아 계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도행전 1:3).
1세기의 의사였던 누가는 이 부활의 확실성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분께서 고난받으신 뒤에 자신이 살아 계심을 많은 확실한 증거들로 그들에게 보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3, 흠정역 / KJV: “by many infallible proofs”)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빈 무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려 했지만 모두 헛수고에 그쳤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허약한 이론들을 제시했습니다 (5번은 저자가 농담으로 지어낸 것입니다):
1)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
The disciples stole the body of Jesus.
먼저, 그들이 어떻게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 군인들을 뚫고 지나갔겠습니까?
또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겼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두려움 없이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할 수 있었을까요?
사실,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한 메시지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거짓말임을 아는 메시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지 않습니다.
2) 여자들이 잘못된 무덤에 가서, 거기가 비어 있다고 착각했다.
The women went to the wrong tomb and found it to be empty.
만일 그런 실수를 했다면, 당시 당국은 즉시 그 실수를 지적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를 알았다면, 그 시신을 곧바로 드러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했어도, 부활이라는 주장은 한순간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보이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환각이나 환영을 경험한 것이다.
The people who claimed to see Christ actually had hallucinations and visions.
이 이론은 한두 명에게는 설명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똑같은 집단 환각을 겪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고린도전서 15:6 참조).
그리고 만약 그들이 착각이었다면, 예수님의 시신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즉시 반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지 않으셨고, 무덤에 들어갔을 때는 아직 살아 있었다.
Jesus did not really die on the cross, and when He was put in the tomb He was still alive.
나는 한 신문 기사에서 이런 질문과 답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문: 우리 교회 목사님이 부활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기절하신 것뿐이며,
제자들이 그를 간호하여 회복시켰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당신 목사님을 쇠가죽 채찍(cat-of-nine-tails)으로 39대 때리고,
얼굴을 여러 번 주먹으로 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뒤, 뜨거운 태양 아래 6시간 매달아 두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심장을 관통시키고, 미라처럼 감싸 무기산 무덤에 넣고,
공기가 거의 없는 무덤에 수 시간 두었다가
어떻게 되는지 보십시오!
이 말은 다소 격렬하게 들릴 수 있으나, 예수님의 죽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5) UFO가 나타나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빔(beam)으로 전송해 갔다.
A UFO came and took away the body out of the tomb by means of a molecular transporter device.
※ 이 이론은 농담으로 저자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결론
당신은 빈 무덤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가지고 계십니까?
나는 지금까지 그 어떤 설명보다도, 사실들과 모든 증거에 조화되는 단 하나의 해답만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바로 그 수많은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증인 중 한 사람은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그것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가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24, KJV)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것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니라. 우리가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24, 흠정역)
우리의 주제로 다시 돌아가서
(Back to Our Subject)
우리는 잠시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펴보는 우회로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내가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는가?
가장 안전하고 확고한 해답은,
무덤을 정복하시고 죽음에서 돌아오신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입니다.
나는 생명과 죽음에 관한 문제에서,
그분을 나의 안내자요, 나의 교사로 삼을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죽음 너머의 진실을 안다면,
그분이 아십니다.
그분은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밝히 드러내신 분”입니다.
(디모데후서 1:10)
“그러나 지금은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불멸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디모데후서 1:10, KJV/흠정역 동일)
만약 당신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무덤 너머의 세계에 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권위자임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당신에게 그다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셨으니,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성경 말씀 안에서,
죽음과 삶,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당신에게 알려준 적이 있었습니까?
나는 이 주제를 가능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앞서,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참된 권위자이심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이 큰 신비에 대한 확실하고 분명한 해답들을 주셨습니다.
그 해답들은 그분의 말씀, 즉 성경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KJV)
“그들을 진리로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흠정역)
또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 KJV/흠정역 동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생명과 죽음—무엇을 의미하는가?
(Life and Death—What is it All About?)
죽음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로마서 5:12, KJV)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로마서 5:12, 흠정역)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단순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KJV/흠정역 동일)
[각주 9: 내가 대학 1학년 때, 아담과 하와가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는 ‘어떻게 누가 아담과 하와가 진짜 역사적 인물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진화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창세기의 기록이 완전히 정확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도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4–6 참조).]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담이 죄를 지은 그 날 육체적으로 즉시 죽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5:5에서는 아담이 그 불순종 이후에도 여러 해를 더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 죽음이 인간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의 일부였다는 것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네 얼굴에 땀이 나도록 네가 빵을 먹다가
네가 그것에서 취해졌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리니
너는 흙이니라.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KJV/흠정역 동일)
[각주 10: 텍사스주 윈즈보로의 더글라스 크랩트리(Douglas Crabtree)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느 날 어린 소년 조니가 자기 방에서 장난감 트랙터를 가지고 놀고 있을 때 어머니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엄마,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단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도 했죠?”
“그래, 맞아.”
“그럼 왜 물어보니?”
“내가 침대 밑을 봤는데, 누군가가 거기에서 지금 오고 있는 중이거나 가는 중이야!”
(출처: Country Magazine, 2001년 2/3월호, p.4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아담은 어떻게 죽었을까요?
그는 그 날 육체적으로 즉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호흡은 계속되었고, 심장도 뛰었으며, 생명 징후도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죽음, 즉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죄를 범했을 때,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은혜 안에서 단절되었습니다.
그는 죄책감과 수치를 느꼈으며, 이전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 연구자들은 이를 종종 **“영적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맺어야 할 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적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Spiritual Life?)
만약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누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영적 생명은 한 사람이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와 교제를 즐길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 개념을 요한복음 17: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KJV/흠정역 동일)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 관계를 말합니다:
- 그분을 알고,
- 그분을 즐기고,
- 그분과 교제하고,
-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 그분께 말씀드리고,
-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딜레마
(Man’s Dilemma)
죄로 인해,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KJV)
“허물들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그분께서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흠정역)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습니다—그들은 걷고, 말하고, 웃고, 울고,
모든 생명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
(에베소서 4:18, KJV: “alienated from the life of God”)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자들”
(에베소서 4:18, 흠정역 동일)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왔노라” (누가복음 19:10)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6)
그들은 자신이 창조된 목적, 즉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삶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더럽혀진 자들과 교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가리워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게 하였느니라.”
(이사야 59:2, KJV/흠정역 동일)
죽음은 언제나 **분리(separation)**를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마음(heart)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21–23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옴이니,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수, 음탕함, 악한 눈, 모독, 교만, 어리석음이니라.
이 모든 악한 것은 속에서 나와 그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마가복음 7:21–23, KJV/흠정역 동일)
내가 솔직히 나 자신을 돌아본다면, 나는 내가 악을 행했고,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에 미치지 못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KJV/흠정역 동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 KJV/흠정역 동일)
죄는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시킵니다.
죄의 대가—죽음
(Because of our sins, there is a penalty)
우리의 죄로 인해 형벌이 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형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KJV/흠정역 동일)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KJV/흠정역 동일)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의 형벌은 반드시 치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완전하고 거룩하신 정의에 따라 죄를 반드시 벌하셔야만 합니다.
이 죽음의 형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서 죽음이란 곧 분리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영원한 죽음, 곧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KJV/흠정역 동일)
“사망과 지옥이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요한계시록 20:14–15, KJV/흠정역 동일)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시되,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5:41,46, KJV/흠정역 동일)
[각주 11: 영원한 형벌과 둘째 사망에 대한 이 구절들은 매우 엄중하고 심각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지옥과 영원한 형벌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이러한 실재를 부인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제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죄의 참혹함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위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그 엄청난 죽음에서 구해내려 하셨는가입니다.]
오늘날 지옥이나 영원한 심판이라는 개념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는 이 주제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해결책
(God’s Remedy)
요약해 봅시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로마서 3:23)
-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23)
- [이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와 심판을 포함합니다.]
- 이 형벌은 반드시 치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눈감아 넘기실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인생은 짧고, 죽음은 확실하며, 죄가 원인이며, 그리스도가 해답이다!
(Life is short;
Death is sure;
Sin the cause;
Christ the cure!)
하나님께서는 해결책(a remedy), 치유책(a cure)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대속적 구원—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Salvation by Substitution)
“우리가 아직 힘이 없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정한 시기에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거의 없고,
선인을 위하여 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KJV/흠정역 동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하여 죽으셨다.”
(고린도전서 15:3, KJV/흠정역 동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그리스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KJV/흠정역 동일)
복음의 중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죄 없으신 구주께서 우리의 자리에 서서 죽으셨다는 것.
그분은 우리에게 마땅히 내려져야 할 사망의 형벌을 자기 자신에게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물로 죽으셨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그 모든 심판은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라.”
(히브리서 7:25, KJV/흠정역 동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KJV/흠정역 동일)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인류를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하셨음에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 Must a Person Do?)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습니다:
“오직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KJV/흠정역 동일)
요한복음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해야 할 단 한 가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 요한복음 3:15–16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요한복음 3:18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느니라.”
- 요한복음 5:24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 요한복음 6:35, 6:47
“나는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느니라.”
-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고 사도행전 16:30–31에서는 간수의 질문과 사도 바울의 대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친구여, 구원은 선행이나 종교적 의식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KJV/흠정역 동일)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자신의 긍휼하심에 따라 하신 것이니…”
(디도서 3:5, KJV/흠정역 동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구주(예수님)**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절망적이고 무력한 상태를 인식하고,
영원한 소망과 무한한 도움을 주시는 구주께 달려가야 합니다.
“너희는 주를 만날 수 있을 때에 그분을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는 풍성히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6–7, KJV/흠정역 동일)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13, KJV/흠정역 동일)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기
(Receiving the Lord by Faith)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그분이 제공하시는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다음에 제시되는 기도문은,
잃어버린 죄인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그분의 놀라운 구원의 사역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읽기 전에,
다음의 성경 말씀들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계시록 3:20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다음은 제안된 기도문입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당신의 법을 어기고,
당신께 죄를 지었으며, 악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저는 잃어버린 죄인이며, 당신의 심판과 진노를 받을 만한 자입니다.
저는 지옥에 마땅히 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그러나 주님, 저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저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게 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저는 그분이 나의 대속물로 죽으셨으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저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기쁘게 영접합니다.
주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시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며,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옵소서.이 땅에서 남은 삶 동안, 당신을 위해 살아가게 하소서.
제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를 온전히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친구여,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뢰하고 영접하셨다면,
저희에게 연락해 주세요.
기꺼이 당신의 질문에 답해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는 학습 자료도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 조지 젤러, 2001년 11월
무덤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What Lies Beyond the Grave – For the Saved Person?)
다음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자, 즉 구원받은 사람에게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3, KJV/흠정역 동일)
“우리는 담대하며,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노라.”
(고린도후서 5:8, KJV/흠정역 동일)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며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노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니라.”
(빌립보서 1:21,23, KJV/흠정역 동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령께서 이르시되,
‘참으로 그러하도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르느니라.’”
(요한계시록 14:13, KJV/흠정역 동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가 많도다.
그렇지 아니하였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한복음 14:1–2, KJV/흠정역 동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리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이나 울부짖음이나 아픔이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요한계시록 21:3–4, KJV/흠정역 동일)
무덤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What Lies Beyond the Grave – For the Unsaved Person?)
다음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
즉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시되,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이들은 영원한 형벌에,
의인들은 생명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25:41,46, KJV/흠정역 동일)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마태복음 7:23, KJV/흠정역 동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불꽃 가운데서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
(데살로니가후서 1:8–9, KJV/흠정역 동일)
“지옥에서 그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더라.”
(누가복음 16:23, KJV/흠정역 동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KJV/흠정역 동일)
신자와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
(The Eternal Destiny of Both Believers and Unbelievers)
다음 성경 구절들은 두 부류의 사람,
즉 예수님을 믿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을 보여줍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마태복음 7:13–14, KJV/흠정역 동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시려 함이 아니요,
그분을 통해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을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요한복음 3:17–18, KJV/흠정역 동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느니라.”
(요한복음 3:36, KJV/흠정역 동일)
“또 이것이 그 기록이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라.
아들을 가진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가지지 아니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5:11–12, KJV/흠정역 동일)